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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커피를 내린다.

원두를 꺼내서 15g만큼의 무게를 측정하고 핸드밀로 갈아낸다. 컴프레소의 바스켓에 원두를 담은 뒤 칠침봉(7개의 바늘로 커피가루가 담긴 바스켓을 균일하게 섞어주는 도구)으로 원두를 잘 섞어준다. 탬핑을 한 후 주사기처럼 생긴 물통을 조립하고, 무선 전기 포트의 물이 끓기를 기다린다.

이 시간만큼은 대부분 무념무상이다. 손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이고, 머릿속은 비워진다. 일상의 가장 안정적인 루틴.

그런데 물이 끓는 2분 정도의 시간 동안, 어제 외출했던 시간이 자꾸만 침투해 들어왔다. 문득 기형도 시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수록된 '어느 푸른 저녁'이라는 시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
...

 

 

그런 날이 있다. 뭘 해도 평소와는 다른 감각, 낯선 풍경, 낯선 사람들의 행동. 어제가 그랬다.


정기적으로 먹는 약을 처방받으러 다녀오는 길도 그랬다. 사람이 좀 없을 시간대를 골라 방문한 내과는 환자 하나 없는데도 접수대는 평소와는 다르게 어수선했다. 혈압과 혈당을 기록하려고 기다리던 병원 직원은 측정하는 내내 혈압계 주위를 툭툭 치면서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진료가 끝나고 나와 수납을 하고 처방전을 기다렸다. 도통 응답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처방전을 왜 안 주냐고 하자 그제야 처방전을 뽑아줬다.

약국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병원에서 수납을 안 하고 갔다고 전화가 왔다. 수납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전표가 없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병원에 가서 수납을 했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자기들 실수로 수납이 2번 되었다고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병원에 들어갔다 나오는 내내 산만하더니, 결국 자기들이 한 실수를 환자에게 전가해서 3번이나 병원을 가게 된 것이다.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길도 그닥 순탄치 않았지만 뭐... 여기까지만 하자.


커피를 내리는 동안에도 어제의 장면들이 자꾸 떠올랐다. 혈압계를 툭툭 치던 손, 전표가 없다던 목소리, 3번 오간 병원 복도. 평소 같으면 이 시간만큼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데.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상한' 일이 일어났던 날이었나 보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일상의 가장 안정적인 루틴조차 흔들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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